
에너지 가격 급등이 단순한 비용 부담을 넘어 산업계 수익성과 저탄소 설비 투자 여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면서, 제조업 중심 구조를 가진 한국 산업의 녹색전환 역시 에너지 안보 리스크를 반영한 대응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7일 발표한 ‘에너지 안보 시대, 삼중 노출 구조 한국 산업의 녹색전환 리스크 대응’ 보고서를 통해 에너지 안보 충격이 단순한 비용 상승을 넘어 수익성 악화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며 산업 녹색전환 자체를 제약하는 핵심 리스크로 작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최근 미국-이란 갈등 심화 등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가 글로벌 에너지 가격 변동성을 키우며 2022년 에너지 위기 재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기존 녹색전환 경로 역시 에너지 시스템 복원력 관점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한국 산업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 △GDP 대비 제조업 비중 △산업부문 에너지 소비 비중이 모두 높은 ‘삼중 노출 구조’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84.2%, 제조업 비중은 26.6%, 산업부문 에너지 소비 비중은 26.4%로 주요국 대비 높은 수준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0% 수준인 미국이나 제조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EU와 비교해 외부 충격 노출도가 훨씬 크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이 같은 구조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생산비 증가로 직결되고, 이는 기업 수익성 악화와 투자 축소로 이어져 저탄소 설비 및 기술 전환 투자까지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형성된다고 분석했다.
실제 2022년 글로벌 유가 및 LNG 가격 급등 시기 국내 철강·석유화학 업종 영업이익률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연구원은 이를 에너지 비용 충격이 산업 경쟁력 약화와 녹색전환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했다. 특히 에너지 집약형 산업일수록 비용 충격이 실적에 직접 반영되면서 탄소중립 설비 투자 여력까지 동시에 약화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이러한 현상을 ‘녹색전환의 역설(Green Paradox)’로 설명했다. 화석연료 기반 시스템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체계가 충분히 구축되지 못하면 에너지 가격 불안정성과 공급 리스크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녹색전환은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외부 충격에도 시스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회복력 있는 전환 경로(Resilient Transition Pathway)’ 설계가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주요국은 이미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조정하고 있다. EU는 재생에너지 확대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화석연료 활용과 수요 관리를 병행해 에너지 충격을 흡수했고, 미국은 IRA와 인프라법(BIL)을 기반으로 세제 인센티브와 첨단 제조업 육성 중심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일본 역시 GX 전략을 통해 탄소가격제와 재정 지원, 공급망 강화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한국 역시 녹색전환 기조를 유지하되 산업 구조 특성을 반영한 차별화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기적으로는 산업용 전력요금 체계 개선 등을 통해 비용 변동성을 완화하고, 중기적으로는 전환금융과 탄소차액계약제도(CCfD) 도입을 통해 기업 투자 여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장기적으로는 고부가가치·저탄소 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해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정부가 올해 상반기 수립 예정인 ‘한국형 녹색전환(K-GX) 전략’ 역시 단순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중심 정책이 아니라, 에너지 가격 리스크 관리와 산업 경쟁력 유지, 전환 투자 지원을 결합한 ‘리스크 대응형 전환 전략’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상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녹색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현재 산업 구조에서는 에너지 안보 충격이 전환 자체를 제약할 수 있다”며 “중요한 것은 단순한 전환 속도가 아니라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리스크 대응형 전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