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가 다음 달 말 종료되면서 주요 수출 시장 의존도가 높은 국내 배터리 산업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기존 전력저장장치(ESS) 시장의 지속적 성장세를 활용하고 드론과 휴머노이드 등 차세대 유망 분야에서 새로운 수요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산업연구원(KIET, 원장 권남훈)이 ‘한국 배터리 산업의 위기 진단과 극복 전략 : 미국 감세법(OBBBA, The One, Big and Beautiful Bill Act) 영향과 대응방안을 중심으로’라는 보고서를 29일 발표, OBBBA 영향으로 미국 배터리 시장이 침체할 경우 대규모 대미 투자를 추진 중인 한국 배터리 업계는 부정적 영향을 입을 것으로 진단했다.
한국 배터리 산업이 전기차 ‘캐즘(Chasm)’ 국면에 직면했다. 주요국 보조금 축소로 전기차 판매가 급감하면서 기업 실적이 악화됐고, 글로벌 시장 점유율도 중국에 역전당했다. 2025년 1분기 기준 한국의 점유율은 42%로, 중국(43%)에 뒤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차 캐즘은 보조금 정책 후퇴와 밀접하다. 캐즘 현상이 가장 심한 유럽의 경우, 제도 변경 직후부터 판매가 급감했다. 실제로 EU 전기차 시장 상위 5개국 중 △독일(-27.4%) △프랑스(-2.6%) △스웨덴(-15.9%)은 보조금 축소·폐지 이후 판매가 급감한 반면, 제도를 유지한 △네덜란드(15.6%) △벨기에(36.9%)는 오히려 증가세를 보였다.
이 여파로 배터리 산업 경쟁 구도도 변하고 있다. EU 시장에서 한국 기업 점유율은 2022년 63.5%에서 2024년 48.8%로 급락, 처음으로 과반에 못미쳤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중국은 34%에서 47.8%로 급등해 한국에 근접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대외협력실장은 “보조금 축소가 전기차 판매 부진을 불러오고, 이는 중저가 LFP 수요 증가와 중국 기업의 점유율 확대라는 메커니즘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예산조정법안OBBBA(One Big Beautiful Bill Ac) 통과로 지원 정책이 변화한다. 특히 한국 기업에 유리했던 전기차 구매세액공제가 오는 9월 30일 종료된다. 이는 사실상의 보조금 효과로 그동안 EV 수요를 떠받쳐 왔으나, 폐지 시 구매 가격 부담이 커져 배터리 수요 위축과 한국 기업 실적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청정에너지 핵심 부품의 미국 내 생산을 지원하는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MPC)가 IRA 원안대로 2032년까지 유지된 것은 한국 배터리 업계에 긍정적이다. 대규모 대미투자를 추진해온 기업들의 수익성 확보에 기여해 왔기 때문이다. 다만 AMPC는 미국 내 생산·판매량에 비례하는 구조(kWh당 최대 45달러)여서, 전기차 구매세액공제 폐지로 판매가 줄면 수혜 규모도 축소될 수 있다.
전기차 구매세액공제 폐지로 미국 시장 내 배터리 판매량 감소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나 유럽처럼 중국에 점유율을 빼앗기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OBBBA로 도입된 AMPC 공급망 요건과 금지외국기관(PFE) 규정으로 중국 기업이 저렴한 LFP를 생산하더라도 한국 기업에 비해 AMPC 수혜 가능성이 낮다.
둘째,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 기업이 자국에서 생산한 저가 배터리를 미국에 수출해도 가격 경쟁력이 크게 저하될 수 밖에 없다. 유럽에 이어 미국 시장에서도 전기차 수요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K-배터리의 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해서는 전기차 외에 새로운 미래 수요분야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첫 번째 분야가 ESS(Energy Storage System)다. ESS시장은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AI 데이터센터 설치 확대 등의 영향으로 2023년 44GWh에서 2030년 508GWh로 10배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미국은 ESS 보급 확대를 계속 지원하며, OBBBA 제정으로 태양광·풍력은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ESS는 유지된다. EV 배터리 수요 감소에 대비해 기존 생산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하거나 신규 투자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군용 드론 시장도 주목할 만하다. 안보 환경 악화로 세계 국방 지출이 늘어나면서 무인 무기 체계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는데, 실전에서 활용되는 무인 무기 체계는 드론이 사실상 유일하며, 러-우 전쟁에서 ‘게임체인저’로 떠올랐다.
군용 드론 시장은 2023년 141억 달러에서 연평균 13% 증가해 2032년 472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드론의 경량·고밀도 배터리 수요가 늘고, 무기 체계 특성상 우방국 중심 공급망 구축이 필수이므로 군용 드론은 한국 배터리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휴머노이드 산업 역시 신수요 창출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AI 기술 발전으로 휴머노이드의 전력 소모가 증가하면서 고성능 로봇용 배터리 수요가 커지고 있다. 현재 제조 원가에서 배터리 비중은 4% 수준이지만, 산업 확산 시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휴머노이드 공급망에서 한국이 강점을 보유한 배터리 분야에 미국과의 협력 확대를 통해 휴머노이드용 고성능 배터리 시장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대외협력실장은 “OBBBA 이후 전기차 배터리 수요 둔화가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ESS, 군용 드론, 휴머노이드 등 새로운 수요 분야를 적극 개척하면 K-배터리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