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반도체 ‘다음’은 생태계에 있었다
첨단 패키징·실리콘 포토닉스·스마트 제조로 경쟁 확대
대만 전후방 산업 결속, 韓 단일 품목 넘어 체질 개선 必
▲ ‘SEMICON Taiwan 2026’에 많은 참관객들이 모여 반도체 산업의 최신 기술 및 제품을 관람 하고 있다.
▲ 신소재경제참관단이 ‘세미콘 타이완 2026’이 개최된 타이베이 난강전시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9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대만 타이베이 난강전시장(TaiNEX)에서 ‘세미콘 타이완 2026(SEMICON Taiwan 2026)’이 열렸다. 올해 세미콘 타이완에는 65개 국가에서 1,300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해 4,300개 부스를 운영했으며, 10만명 이상의 전문 참관객이 찾았다. 전시 규모와 참여 기업 모두 역대 최대 수준이었다.
AI 반도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반도체 경쟁은 미세공정뿐 아니라 첨단 패키징, 테스트·계측, 실리콘 포토닉스, 제조 자동화 등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신소재경제신문은 9월1일부터 4일간 일정으로 업계 관계자들과 참관단을 구성해 세미콘 타이완과 TSMC 혁신박물관을 방문했다.
9월 초, 타이베이에는 여름의 더위와 습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와 빌딩 사이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자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가 느껴졌다. 넓은 전시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통로마다 정교한 장비 시연과 기업 관계자들의 열정적인 기술 설명이 쉼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시장 전체를 메운 압도적인 규모와 인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엇부터 봐야 할지 잠시 고민될 정도였다. 하지만 관람을 하다 보니 첨단 패키징과 스마트 팹 등 최신 기술들이 전시장 전면에 배치된 구조 자체가 AI 시대 반도체 산업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1관에는 실리콘 포토닉스와 테스트, 소재, 3DIC 첨단 패키징, FOPLP, 칩렛 관련 공간이 조성됐고, 2관에는 스마트 제조와 첨단 시설 관련 영역이 들어섰다. 이러한 배치는 AI 시대 반도체 산업의 기술 지형도를 직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여러 전시 공간을 둘러보면서 반도체 제조를 구성하는 기술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도체 제조는 웨이퍼 위에 회로를 형성하는 공정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칩을 연결하고 패키징하는 기술부터 이를 검사하고 계측하는 기술, 생산공정을 자동화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운영하는 기술까지 전방위적 생태계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 전시장에서는 3DIC 본딩(右)과 실리콘 포토닉스 등 AI 반도체의 성능 향상을 뒷받침하는 첨단 패키징·광기술 장비도 확인할 수 있었다.특히 눈길을 끈 것은 첨단 패키징과 실리콘 포토닉스였다. 3DIC, FOPLP, 칩렛 기술이 별도 공간에서 소개되고 포럼에서는 HBM과 이종집적, 열관리, CPO 등 AI 시대의 시스템 통합을 뒷받침하는 기술들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더 작은 선폭을 다투던 과거의 경쟁을 넘어, 이제는 여러 칩을 어떻게 연결해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현하고 데이터 전송 과정의 전력과 열을 제어하느냐가 핵심 축이 된 것이다. 데이터 이동량의 한계를 광학 기술로 극복하려는 실리콘 포토닉스 부스들 역시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컴퓨팅의 미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반도체가 고성능화될수록 테스트와 계측의 역할도 커지고 있었다. 전시장 한쪽에서는 패키징 이후의 검사와 계측 기술이 소개됐고, AI 기반 검사와 미세 측정 기술도 눈에 들어왔다. 반도체의 성능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만들어진 칩이 요구되는 품질과 수율을 확보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경쟁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었다.
하루만으로는 전시장 전체를 둘러보기 어려웠다. 다음 날 다시 전시장을 찾아 전날 미처 보지 못했던 공간을 살펴봤다. 두 번째 관람에서는 개별 장비나 제품보다는 서로 다른 기술이 하나의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조금 더 눈길이 갔다.
▲ `세미콘 타이완 2026` 스마트 팹 존에 로봇과 자동화 관련 기술이 전시돼 있다.특히 올해 처음 마련된 스마트 팹 공간에서는 AI와 로봇, 자동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반도체 제조현장의 운영 방식을 바꾸려는 기술들이 소개됐다. 장비를 자동으로 움직이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정을 판단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조 기술이 진화하고 있었다.
장비와 소재, 검사, 패키징 기업들은 서로 다른 부스에서 각자의 기술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하나의 반도체가 완성되기까지는 각자의 역할을 맡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전시장을 둘러 볼수록 반도체 산업의 변화는 어느 한 분야의 기술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술이 맞물리는 과정에서 완성된다는 점이 선명해졌다.
이번 세미콘 타이완의 주제인 ‘Transform Tomorrow’가 처음에는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하나의 슬로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현장에서 다양한 기술을 하나씩 마주하고 그 기술들이 더해져 작동하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니, 이 문구가 말하는 ‘내일의 변화’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기술의 변화를 이론이나 숫자가 아닌 눈앞에서 직접 확인했던 전시장은 그 자체로 산업의 핵심적인 현장이었다.
전시장 못지않게 이번 참관단 일정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곳이 TSMC 혁신박물관이었다. 신주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TSMC의 성장 과정과 집적회로 산업의 발전, 창업자 장중머우(張忠謀)의 이야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반도체가 하나의 부품에서 다양한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 기술로 발전해온 과정이 펼쳐졌다. 이어 TSMC가 성장해온 과정과 파운드리 사업 모델, 반도체 산업에서 맡아온 역할을 살펴보면서 지금의 TSMC가 만들어진 과정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 신소재경제참관단이 TSMC 혁신박물관을 방문해 관계자로부터 제품 설명 및 회사 역사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TSMC의 철학이었다. 자체 브랜드의 반도체 제품을 만들어 고객과 경쟁하기보다 고객이 설계한 반도체를 생산하는 순수 파운드리 역할에 집중한다는 원칙이다. 고객의 경쟁자가 아닌 제조 파트너로 자리한다는 철학은 TSMC의 성장 기반이 됐을 뿐 아니라, 각 기업이 자신의 전문 영역에 집중하며 함께 성장하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토대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설명을 듣고 나니 세미콘 타이완에서 마주했던 전시장 풍경이 다시 보였다. 부스마다 장비와 소재, 검사·계측, 패키징, 광기술 등 서로 다른 분야의 기업들이 각자의 기술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만으로 반도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각 기업이 자신이 맡은 영역에 집중하면서도 전·후방 산업과 긴밀하게 연결돼 하나의 생산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다.
대만 반도체 산업이 보여준 강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계부터 제조, 장비와 소재, 패키징과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가진 기업들이 각자의 경쟁력을 키우면서도 하나의 산업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장 곳곳에서 기업들이 각자의 기술을 바탕으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이러한 산업 생태계가 현장에서 구현된 모습처럼 다가왔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지만 대기업과 메모리 제조업 중심의 구조에 편중되어 있다. 메모리에 투자가 집중되는 동안 시스템 반도체와 팹리스, 후공정 등 전·후방 연관 생태계는 상대적으로 취약해졌고, 주요 제조기업의 해외 이전이 이어지면서 팹리스가 필요로 하는 국내 수요 기반도 함께 줄어들었다.
TSMC 혁신박물관과 세미콘 타이완의 전시장 풍경은 이러한 산업 구조를 돌아보게 했다. 메모리 경쟁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시스템 반도체와 팹리스, 장비·소재, 패키징·테스트 등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국내에서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수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분야의 경쟁력에 의존하기보다 다양한 분야의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갖추는 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넓히는 데 필요한 과제라고 느꼈다.
▲ 신소재경제 참관단이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식당에서 즐거운 식사와 함께 친목도모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일정 동안 저녁마다 참관단과 식사를 나누며 그날 둘러본 전시와 대만 반도체 산업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같은 현장을 둘러보았음에도 주목하는 지점은 달랐다. 장비와 소재에 대한 기술적 견해부터 공급망과 사업 기회를 읽어내는 분석까지 다양하게 아우러졌다. 혼자였다면 지나쳤을 기술도 각 분야 전문가분들의 설명이 더해져 새롭게 다가왔다. 현장을 함께한 분들과의 소통은 하나의 기술을 한층 넓고 다각적으로 이해하게 해준 소중한 수확이었다.
▲ 신소재경제신문 참관단이 예류 지질공원을 방문했다.일정 중간 중간 찾아든 대만의 풍경은 알맞은 숨고르기가 되어주었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깎아낸 예류 지질공원의 기암괴석과 해안 지형은 수평선 너머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어우러져 자연의 압도적인 장엄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자연의 울림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수천 년 역사의 정수가 담긴 유물들, 특히 세월을 뛰어넘어 섬세한 숨결을 간직한 옥공예품과 정교한 유물들을 마주하는 동안에는 초고속과 미세화를 다투는 첨단 반도체 기술의 속도감과는 또 다른 대만 특유의 정갈하고 깊은 문화적 결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3박 4일간의 이번 여정은 단순한 전시 참관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전시장 안팎에서 확인한 전·후방 산업 간의 정교한 협력과 다양한 기업들의 움직임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글로벌 산업 최전선의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신소재경제신문과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함께한 참관단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