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전력 해법 해상풍력,
국산 탄소섬유 생태계가 성패를 가른다
▲ 유병민 수석 연구원(左)·송현도 책임 연구원(右)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디지털 혁신의 화려한 이면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전력 수요라는 거대한 구조적 부담이 도사리고 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경쟁력을 좌우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 AI는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실시간으로 재구성하는 핵심 기반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24시간 가동되는 데이터센터와 생성형 AI 서비스는 기존 디지털 검색 대비 수배 이상의 전력을 소모하는 거대 흡수원으로, 이미 전 세계 전력 소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AI 기술의 고도화와 클라우드 인프라의 확장이 맞물리면서 미래의 전력 수요 곡선은 구조적으로 우상향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디지털 경쟁력이 곧 안정적인 에너지 자원 확보 능력과 직결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시장 속에서 산업 경쟁력의 정의를 완전히 새롭게 내리고 있다. 과거에는 반도체의 미세 공정과 소프트웨어가 기술 우위를 결정했다면, 이제는 이를 안정적으로 지탱할 에너지 공급망의 실효성과 지속 가능성이 핵심 변수다. 거대한 전력 수요를 감당하면서 글로벌 무역 장벽인 탄소중립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상황에서, 친환경 재생에너지는 자국 산업 생태계의 실익을 담보하는 필수 불가결한 기반이 될 수밖에 없다.
■해상풍력 경쟁력 사각지대, 국산 핵심 소재 생태계
청정에너지 패러다임의 최전선이자 국가 에너지 믹스의 핵심 축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해상풍력이다. 풍력발전은 기상 조건만 충족되면 기가와트(GW)급 대규모 전력을 지속해서 생산할 수 있어, 첨단 산단에 가장 적합한 발전원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RE100 이행과 전력구매계약(PPA)을 통한 재생에너지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따라 풍력발전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세계풍력에너지협의회(GWEC)에 따르면 2025년 한 해에만 164.6GW의 풍력발전이 신규 설치되었으며, 2030년까지 매년 5.2%의 성장이 전망된다. 우리 정부 역시 이러한 에너지 지형의 변화를 고려하여, 2035년까지 25GW 이상의 대규모 해상풍력을 보급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풍력 시장의 트렌드도 발전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터빈의 대형화’로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중국이 26MW급 초대형 터빈의 시험 설치를 추진하고, 유럽 또한 21.5MW급 프로토타입을 공개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술 고도화 경쟁이 한층 치열하다.
터빈이 거대해질수록 블레이드(날개)가 받는 물리적 하중은 급격히 증가한다. 특히 엄청난 정하중과 회전하중을 지지하는 블레이드 내부의 골격인 ‘스파캡(Spar Cap)’의 물성이 터빈 전체의 성패를 결정하는데, 이 가혹한 하중을 견디면서 무게를 줄일 수 있는 핵심 복합소재가 바로 ‘탄소섬유’다. 결국 해상풍력의 진정한 경쟁력은 외형적 성장을 넘어, 대형화의 열쇠인 탄소소재를 시작으로 전방위적인 후방 산업 생태계를 얼마나 견고하게 자국 내에 구축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 해상풍력 보급계획 및 국내 공급능력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해상풍력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면 심각한 구조적 비대칭성이 드러난다. 2025년 공공주도형 경쟁입찰에서 0.7GW 전량이 국산 터빈사로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내실을 들여다보면 핵심 소재·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그동안 국내 풍력시장은 협소한 내수시장과 제한적 물량으로 인해 블레이드 등 핵심부품 제조생태계가 취약한 구조에 머물러 있다. 실제로 정부의 연 4GW 규모의 해상풍력 구축 계획에 비해, 현재 국산 블레이드 공급 능력은 연 0.1GW에 불과해 이번 입찰 물량조차 해외 블레이드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국내에서 블레이드를 제작하더라도, 그 핵심인 탄소섬유 등 원소재를 수입에 의존한다면 국내 산업에 남는 부가가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산 터빈과 블레이드라는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그 심장인 탄소소재를 조달하지 못하면 결국 껍데기만 국산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과거 신산업 확대 초기 단계에서 핵심 공급망을 자립화하지 못한 채 설비 보급에만 급급했던 국가들이 직면한 부작용을 목격했다. 과거 국내 전기차 산업 육성을 위해 보조금을 투입했으나 정작 중국 전기 버스가 안방 시장을 장악했던 사례나, 태양광 보급을 늘렸음에도 제조 공급망을 중국에 빼앗겨 사후 유지보수(O&M)조차 어려워진 유럽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핵심 소재와 자체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산업 주도권이 외부로 이동해 향후 유지보수의 어려움, 가격 경쟁력 약화, 공급 불안정이라는 구조적 취약성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자국 소부장 생태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재생에너지 보급 정책은 결과적으로 타국 산업에 실익을 내주는 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해상풍력 정책은 단순히 설비의 보급 수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자국 공급망의 내재화를 위한 ‘산업 생태계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첨단 산업 경쟁력 전제 조건 재생E 확보, 승부는 설비 보다 공급망
해상풍력 실익 극대화 블레이드 핵심 탄소섬유 등 밸류체인 내재화 시급
■해상풍력 미래와 실익, 탄소소재·제조의 내실
국내 해상풍력 산업 생태계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탄소소재를 필두로 한 후방 공급망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산업적 차원의 입체적인 전략이 시급히 가동되어야 한다.
첫째, 고정가격입찰 제도 등 국가 정책 제도 설계 단계에서 국산 핵심 소재 및 부품의 실질적 가치와 기여도를 정교하게 반영하는 평가 체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터빈 대형화의 핵심은 탄소소재 부품이지만, 현행 입찰 제도의 평가지표 구조상 블레이드는 나셀의 하위 품목으로, 탄소섬유 등 원소재는 그보다 더 하위 항목으로 분류되어 중요도가 매우 낮게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발전사업자는 입찰 시 관련 점수를 아예 배제해 버리고 가격 경쟁력이 높은 해외 소재와 부품을 선택할 유인이 크다. 더구나 해외 소재를 써도 국내에서 제작만 하면 국산 블레이드로 인정받는 기준의 맹점 탓에, 진짜 국산 원소재는 안방에서조차 철저히 소외받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블레이드를 풍력터빈의 독립적인 핵심 부품으로 격상시키고, 국산 소재 적용 배점을 대폭 상향하여 자생적인 수요를 확실히 창출해야 한다.
둘째, 개발부터 실증까지 단일 선상에서 유기적으로 회전하는 ‘클러스터형 통합 공급망’이 시급하다. 우리나라는 뛰어난 R&D 성과로 독자적인 블레이드 모델과 핵심 소재 기술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협소한 내수 판으로 인해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해 글로벌 공급 능력과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는 구조적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게다가 블레이드 제조 공장과 핵심 소재(탄소섬유 및 인발부품 등) 생산지가 사방에 파편화되어 있어 과도한 물류 비용과 긴 리드타임이라는 고비용 구조의 덫에 갇혀 있다.
공급망 전 과정을 한 울타리에 묶어 압도적인 단가와 공급 능력을 무기로 세계 시장을 삼키고 있는 중국의 전략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도 블레이드 제조 공장을 중심으로 핵심 소재 라인을 바짝 집적화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배후항만과 연계된 대규모 ‘블레이드 클러스터’(개발·제조·양산·운송·설치·O&M 집적화 단지)를 조성해 전 공정을 일원화해야만, 외산의 가격 공세에 맞설 진짜 토종 공급망의 힘을 기를 수 있다.
셋째, 시장 진입의 최대 관문인 ‘실증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 가혹한 해상 환경과 지속적인 피로하중을 버텨야 하는 특성상, 장기 운전 신뢰성은 부품 경쟁력의 핵심이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공인된 실증 데이터(Track Record)가 없다면 글로벌 시장은 물론 국내 시장 진입조차 불가능하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발전사업자들이 검증되지 않은 소재 채택을 극도로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의 국가 R&D 사업은 신규 모델 개발 자체에만 지원을 집중해 왔다. 실증과 인증을 거쳐 양산으로 이어지는 전주기적 징검다리가 부재하다 보니 기업들이 기술을 개발하고도 정작 안방에서조차 보급 실적을 쌓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는 공급 전략의 축을 옮겨 기술 개발 단계부터 대규모 실증단지 운영, 철저한 성능 평가, 글로벌 표준에 부합하는 국제 인증 연계를 톱니바퀴처럼 병행 지원해야 한다.
넷째, 민간 기업의 선제적 투자를 유도할 정책 금융과 세제 지원 체계가 가동되어야 한다. 대규모 자본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 소부장 산업의 특성상 국내 기업들이 대량생산 체제 구축을 위한 수천억 원 규모의 설비 자동화 투자를 독자적으로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초기 투자 리스크를 개별 기업의 몫으로 전가한다면 공급 능력 확대는커녕 유망 기업들마저 시장 진입 단계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는 단순한 일회성 보조금 지급을 넘어, 기업의 투자 리스크를 분산하고 장기 투자를 안정적으로 견인할 정책적 안전판이 필요하다. 해상풍력 전용 금융상품 설계와 파격적인 세제 혜택, 국가 차원의 탄소산업 발전기금 조성 등으로 확실한 마중물을 부어주어야만, 비로소 정부의 청사진을 뒷받침할 진짜 대량생산 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부터 다져진 탄소소재 생산 능력은 단순히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을 넘어, 에너지 대전환의 흐름 속에서 국내 제조업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해상풍력 시장의 최종 승자는 외형적인 플랜트 건설에 치중하는 국가가 아니라, 블레이드의 뼈대인 탄소섬유 공급망 구조를 자국 생태계 안에 완벽히 내재화한 국가가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생태계의 성패를 가를 마지막 골든타임인 만큼, 이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소재 국산화라는 본질적인 내실을 반드시 다져야 한다. 민·관의 유기적인 협력으로 구축한 견고한 토종 생태계야말로 글로벌 에너지 전환의 거대한 파고를 넘어 우리 제조업의 실익을 지켜낼 가장 확실한 버팀목이다.
▲ 풍력발전 산업에서 국산 소재·부품 적용 확대 방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