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적층제조, 생산성·신소재 발전 ‘오늘의 양산기술’로 진화
◇연재순서
1)전시회 총괄평가
2)금속 분말 기술 트렌드와 기업의 전략
3)적층성형용 Al 합금 소재의 합금설계 방안 및 적용 사례
4)높은 형상복잡도를 가진 소형 정밀 부품 제조기술 동향
5)플라스틱 AM의 글로벌 경쟁구도와 한국의 기회
6)플라스틱 적층제조 기술동향
7)마이크로·나노 3D프린팅 기술 동향
8)좌담회-적층제조의 미래, 청년이 이끈다

이번 ‘폼넥스트 2025’는 적층제조(Additive Manufacturing, AM) 기술이 더 이상 ‘미래의 기술’ 이 아닌 ‘오늘의 제조 공정’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분기점이었다.
전시장 분위기는 ‘역동적인 진화(Dynamic Evolution)’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총 5만㎡의 전시 공간은 AM 기술이 더 이상 시제품 제작(Prototyping)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양산(Mass Production)의 도구로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증명하는 거대한 스마트 팩토리와도 같았다.
글로벌 리더부터 스타트업까지 플라스틱 적층제조 신기술을 뽐내며 경쟁하는 모습은 산업 지형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음을 방증했다. 곳곳에서 “올해는 작년보다 한층 ‘생산 현장’에 가까워진 느낌”이라는 말이 들렸고, 실제로 생산성, 신소재, 공정 통합, 가격 경쟁 등이 전시 전반의 화두로 체감되었다. 마치 향후 5년간 플라스틱 AM 산업의 방향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현장이었다.
Formnext 2025에서 확인된 가장 위협적인 트렌드는 중국 기업들의 약진이었다. 한 산업 전문가의 메모에 적힌 ‘서구 기업들이 새로움(Novelty)을 위해 싸울 때, 중국은 수용성(Acceptance)을 위해 싸운다’는 문구는 현재의 판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중국 기업들은 혁신적인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시장이 요구하는 스펙을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가장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순(Farsoon)은 ‘중국의 EOS’라 불리며 금속과 폴리머 양쪽에서 서구권 경쟁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초대형 금속 장비뿐만 아니라 고속 플라스틱 소결 기술인 ‘Flight’ 기술을 강조하며 ‘Flight HT601P-2’와 같은 시스템은 강력한 파이버 레이저를 사용하여 기존 CO2 레이저 대비 소결 속도를 높이고, 미세한 디테일을 구현했다.
TPM3D는 컴팩트한 사이즈의 ‘CF200+PPS200’ 시스템을 선보이며, Formlabs의 ‘Fuse 시리즈’가 장악하고 있는 보급형 SLS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은 클리닝 및 파우더 처리 시스템(PPS)을 통합하여 좁은 공간에서도 안전하게 파우더를 관리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 연구소 및 소규모 시제품 제작실의 수요를 공략하고 있었다.
▲ TPM3D 사 신제품 CF200+PPS200
▲ 11월18일 오후 3시에 공식 출시된 중국 Bambu Lab의 신제품 ‘H2C’를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부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중국의 하드웨어 공세에 맞서 서구권 기업들은 ‘단순 하드웨어 판매’가 아닌 ‘솔루션 및 생태계 제공’으로 전장을 옮기고 있었고, 이들은 중국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소재 노하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글로벌 인증(Certification)을 무기로 삼고 있었다.
스트라타시스(Stratasys)는 ‘Get Serious About Additive’라는 슬로건 아래, 하드웨어 자체보다는 소재의 혁신과 실제 양산 적용 사례에 집중했다. ‘ToughONE WhiteS’와 같은 고기능성 폴리젯 소재는 기존 시제품의 약한 내구성을 보완하여 기능성 테스트가 가능한 수준으로 물성을 끌어올렸다. 또한, DLP 플랫폼인 P3 시스템을 위한 ‘Silicone 25A’ 소재는 100% 실리콘의 유연성과 생체 적합성을 제공하여 의료 및 웨어러블 기기 시장을 정조준했다.
후처리 전문 기업인 DyeMansion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여 출력물의 표면 품질을 사출 성형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완전한 공정(Full Workflow)’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았고 이는 고객에게 단순히 프린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최종 부품’을 얻을 수 있는 솔루션을 판다는 접근 방식이었다.
▲ 실리콘의 유연성과 생체 적합성을 제공하는 스트라타시스의 ‘Silicone 25A’ 소재 3D시스템즈(3D Systems)는 ‘SLA 825 Dual’을 통해 듀얼 레이저 시스템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주조(Foundry) 산업을 겨냥한 ‘Accura SbF’ 소재 등 버티컬 마켓에 특화된 솔루션을 제시했다. 특히 주조용 패턴(Pattern) 시장은 전통적인 제조 공정을 AM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장 중 하나로, 3D Systems는 이 분야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경쟁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中 제조현장 맞춤 솔루션 특화, 서구 기업 최종 부품 생산 소재·장비·SW 통합 제공
韓 로봇·자동화·AI 역량과 AM 통합 통한 특화 틈새시장 발굴 글로벌 개척 나서야
▲ 3D Systems의 듀얼 레이저 시스템 ‘SLA 825 Dual’ 장비 및 ‘Accura SbF’ 소재의 출력물이번 전시회는 AM 산업의 낭만적인 시대가 끝나고 냉혹한 현실의 경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조 제국과 기술적 해자를 구축한 서구권 선도 기업들 사이에서 한국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추격자가 아닌 개척자로서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 보였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기업들과 달리, 한국의 AM 산업 현실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규모와 범위 안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다. 국내 AM 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으나 여전히 전 세계의 몇 퍼센트 남짓에 불과한 작은 파이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산업 구조상, 한국은 완성차·전자처럼 대량생산 제조업 중심 생태계를 갖고 있어 적층기술의 주 활용이 시제품 제작이나 금형 제작 보조 등에 머물렀다. 전시회에서 만난 한 해외 전문가는 “한국은 제조 강국이지만 AM 만큼은 아직 니즈 대비 활용이 저조하다”는 촌평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2010년대 중반 한때 국내에 1000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AM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과도한 경쟁과 기술력 부족으로 다수 도태되어 현재는 100여 개 수준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인력과 R&D 자원 부족, 그리고 기술에 대한 이해 미흡이 빚은 성장통이자 구조적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산업 현장에서는 3D프린터 도입 시 운용 인력의 전문성 부족으로 제대로 활용 못 하고 되팔아버리는 일도 빈번했다는 지적이 있다.
소재 개발 역량 역시 글로벌 화학기업들이 선도하는 기능성 레진·분말 분야에서 국내 기업 존재감은 미미하고, 생산 자동화나 소프트웨어 통합 측면에서도 국내 솔루션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무엇보다 해외 공룡 기업들과 견줄 만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한국 기업이 없다는 점에서, 국내 업체들은 우수한 기술이 있어도 세계 시장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도 경쟁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틈새 기회는 있다. 한국 제조업 전반에 축적된 고도화된 엔지니어링 역량은 AM과 결합할 때 시너지를 기대할 만하다.
예컨대 품질 관리, 공정 최적화에 강한 국내 제조 DNA를 살려 AM 공정의 정밀 제어와 안정화에 집중한다면 신뢰성 높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민첩성도 한국 기업의 장점이다. 고객 맞춤형 요구에 기민하게 맞춰 솔루션을 제공하거나, 틈새 시장을 재빨리 파고드는 전략은 대기업에 비해 몸집이 작은 국내 업체들이 취하기 유리한 접근이다.
필자가 재직중인 글룩은 SLA 3D프린터 수십 대를 운영하며 수천~수만 개 단위의 AM 생산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민첩한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 국내 최대 적층제조 대량양산 시스템이 구축된 글룩의 스마트 팩토리또한, 로봇·자동화·AI 융합 역량은 한국이 보유한 잠재적 우위 분야다. 이미 스마트팩토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로봇 기술을 보유한 한국이기에, AM 장비를 산업용 로봇 셀과 결합하거나 AI를 통해 생산공정을 지능화하는 통합 솔루션을 만들어낼 저력이 있다.
이러한 융합형 솔루션은 글로벌 대형 제조사들이 선뜻 시도하기 어려운 신흥 영역으로서, 한국 기업이 선점할 수 있는 전략적 포지션이 될 수 있다. 요컨대 국내 업체들은 ‘남들이 하지 못한 것, 그러나 우리에게는 잘 맞는 것’을 찾아 전문성을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초정밀 의료기기 부품, 커스터마이즈드 소비재 생산 서비스, 혹은 기존 산업공정에 쉽게 도입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AM 자동화 장비 등에서 독자적 강점을 확보한다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틈새지만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향후 5년간 플라스틱 AM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산으로서의 AM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안정적으로 만드는 기술 경쟁이 가속화되고, 소재 개발과 공정 통합을 통해 기존 제조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글로벌 기업들은 경쟁하면서도 때론 협업하며 AM을 주류 생산기술로 끌어올리기 위한 판을 짜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지금 중대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 뒤처진 약점을 직시하고도 예전 방식대로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남들보다 빠르게 학습하고 특화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할 것인가.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바라본 저녁 노을처럼, 새로운 시대의 서막은 이미 밝아오고 있다. 한국의 AM 산업도 이 흐름을 타기 위해 과감한 투자와 협력, 그리고 전략적인 전문 분야 공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전시회에서 얻은 인사이트는 분명하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 제조 혁신의 기회도 놓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자기 길을 찾는다면, 치열한 플라스틱 AM 전쟁 속에서도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하며 새로운 성공 스토리를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화학, 제조, IT의 강점을 AM이라는 그릇에 잘 담아낸다면, 거대 자본과 물량의 파도 속에서도 빛나는 ‘강소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누구에게, 어떻게 팔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행해야 할 때이다. 이번 폼넥스트 에서 받은 도전과 영감이 한국 AM 업계의 분발과 도약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