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반도체 글로벌 경쟁력, 기술보다 연결에서 나온다”
여행은 늘 설렘이라는 작은 폭죽으로 시작된다. 필자는 이번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신소재경제신문이 구성한 세미콘 타이완 참관단에 합류했다. 매년 세미콘 코리아를 찾았고 지난해에는 세미콘 웨스트를 경험했지만 대만 세미콘의 첫걸음은 또 다른 흥분을 안겨주었다.
9월 10일 새벽, 인천공항에 모인 우리 팀과 참관기업 직원들의 피곤한 얼굴 위로 기대감이 묻어났다. 2시간 10분의 비행을 끝내고 타이페이 공항에 내려 관광버스를 탔을 때, 현지의 뜨겁고 습한 공기와 긴 여정이 주는 작은 고난조차도 신기하게 설렘의 일부가 되었다. 몸은 살짝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미 전시장 한가운데를 미리 걸어다니고 있는 듯했다.
대만 세미콘 전시장은 샌프란시스코 세미콘 웨스트 2024와 흡사하게 1관과 2관이 마주 보는 구조로 구성돼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56개국에서 1,200여 기업이 참가하고, 4,100여 부스가 운영되며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전시장 규모는 코엑스와 비슷했으나 한쪽이 조금 더 길어 공간감이 달랐다.
‘Leading with Collaboration, Innovating with the World’라는 이번 전시회 주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참가국들의 적극적인 글로벌 협력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등 전통 강국은 물론, 베트남, 코스타리카, 리투아니아, 스웨덴, 칠레, 스페인,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가 전시회에 참여하며 다채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뒤섞인 활기찬 현장을 만들어냈다.
세미콘 타이완의 첫인상은 단번에 ‘대만의 강점’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세미콘 웨스트나 세미콘 코리아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인공지능(AI)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역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대만의 중심은 첨단 패키징 기술에 있었다. 팬아웃 패널레벨 패키징(FOPLP), 이종집적화(Heterogeneous Integration), 3D IC가 전면에 나섰고, 실리콘 포토닉스(Si photonics)는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에서 대만의 독보적 경쟁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반도체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체감하고, 우리 산업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특히 CPO(Co-Packaged Optics), Optical Engines, 칩렛(Chiplet)은 산·학·연 협력이 활발한 분야로,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했다. 단순히 기술 트렌드를 나열하는 전시가 아니라 ‘기술과 전략, 협력과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린 구조를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전시장 곳곳에서 기술 혁신뿐 아니라 산업 구조와 전략적 협력의 중요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첨단 패키징 기술과 반도체 생태계의 강점이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단순히 기술을 나열하는 전시가 아니라 기술과 전략, 협력과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린 구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첨단 패키징과 반도체 생태계가 맞물리며 글로벌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소재 측면에서는 실리콘 기판을 넘어 SiC, SOI, 화합물 기판 등 다층적 접근이 인상적이었다. 측정·분석 장비(Metrology & Inspection) 역시 국내 전시와 달리 광측정, 광분석, 모니터링 시스템이 함께 전시되며 입체적 기술 생태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패키지용 소재 업체들의 참여도는 생각보다 더욱 압도적이었다. 주 전시장 외에 3층 별관까지 이어진 전시장 부스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말 그대로 ‘타이페이의 거리’를 연상케 할 만큼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틈새를 공략하는 소규모 기업들의 에너지가 대만 반도체 생태계의 저력을 대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성능 인공지능 칩 제조의 가치사슬도 대만의 전략적 강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이 HBM(High Bandwidth Memory)을 제작해 TSMC에 공급하면 TSMC는 이를 기반으로 GPU용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하고, CoWoS(Chip-on-Wafer-on-Substrate) 기술을 통해 완성된 AI 시스템을 구현한다.
이 과정에서 전기적 테스트(Electrical Test)는 첨단 패키징만큼이나 핵심적인 단계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여전히 미약하다. CoWoS 공정의 검사 단계에 삼성조차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시회에서도 관련 검사 장비나 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팬아웃 패널·이종집적화 등 대만 첨단 패키징 기술, 글로벌 반도체 선도
소부장 연결 중심 공급망 활용, 韓 경쟁력 강화 및 영향력 확대 필요
전시장에서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자동화 로봇이다. TSMC의 올해 2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인공지능 칩을 비롯해 스마트폰, IoT, 차량용 칩, 가전 및 기타 순으로 매출 비중이 나타난다. 이 중 차량용 칩은 전체 Revenue의 4%에 불과하지만, 인공지능이 탑재된 자율주행차 시장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전시장 곳곳에서는 자동화 로봇이 눈에 띄었다.
대만 로봇 기업들이 선보인 제품은 주로 이동형 조립 및 핸들링 로봇이었으며, 일본의 대표 기업들(FANUC, YASKAWA 등)은 보다 정교하고 복합적인 동작을 구현하는 자동화 솔루션을 선보였다. 이는 기술 수준의 차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만은 오랜 기간 일본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산업 전반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교통, 상점가, 심지어 도로를 오가는 차량까지 일본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도 소재·부품·장비 전반에 걸쳐 일본과 긴밀한 협력 체계가 형성돼 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성장 기반을 마련해 왔다면, 이제는 대만과의 협력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특히 수교 단절 이후 끊겨 있던 기술 및 공급 협력의 물꼬를 다시 트는 것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전시장 전체를 돌아본 인상으로, 대만은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현지 장비 기업을 찾기 어려웠고, 장비 국산화가 쉽지 않은 산업 구조와 생태계의 한계가 드러났다. 이 부분은 오히려 우리나라가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며, 장비와 핵심 부품의 공급망을 중심으로 양국 간 협력의 폭을 넓혀갈 여지가 충분하다고 느꼈다. 특히 일본산 반도체용 소재와 부품을 국내 기업의 높은 품질과 가성비로 대체할 수 있다면 경쟁력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한국 기업들도 눈에 띄었다. KOTRA 공동관을 비롯해 모두 각자의 기술과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뚜렷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개별 기술이 반도체 생태계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링크(연결)’의 시선이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SiC 소재를 판매하는 기업은 식각 장비용 내식·내화학 부품으로만 영업했고, 옆 부스의 TC 본더나 하이브리드 본더로 확장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KOTRA관의 다른 기업도 다양한 형태의 SiC 판재를 전시했지만, 실제 패키징 공정과의 연계는 놓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는 공급망 전반을 면밀히 살펴보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소재·부품·장비의 경계 속에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해 기회를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산업용 및 특수가스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원료 조달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도, 이번 참관 중 바로 옆에서 원료를 생산하는 국내 대기업조차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모습은 우리 산업 생태계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핵심 문제는 기술 자체보다 ‘연결’의 부재에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KOTRA의 산업 데이터와 공급망 자료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신소재경제신문이 그 가교 역할을 해준다면, 기업 간 정보 교류와 산업 전반의 시너지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산업을 연결해 주는 언론의 역할이야말로 우리나라 소재·부품·장비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번 참관을 주관해 주신 신소재경제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출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챙겨주신 덕분에 일정 내내 편안하고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았던 배려와 세심한 준비는 이번 여정이 즐겁고 의미 있게 완성될 수 있었던 숨은 공로자였다. 더불어 짧은 소견이지만, 이렇게 참관기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또한 감사드리며, 이번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