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발효된 미국의 ‘대규모 감세법(One Big Beautiful Bill Act, OBBBA)’으로 인해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조기 종료와 배터리 세액공제 요건 강화가 예고돼, 한국 기업의 미국 내 전기차 판매액이 약 19억 달러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에 국가첨단전략산업기금 조기 조성과 세액공제 유동화, 국내 생산 촉진 세제 등 정부 차원의 종합 지원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한국경제인협회(이하 한경협)는 21일 ‘미국 트럼프 대규모 감세법의 자동차·배터리 산업 영향 및 시사점’ 보고서를 발표하며,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유지를 위한 정책 과제를 제안했다.
OBBBA는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근거해 시행 중이던 다수의 청정에너지 지원 정책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한국 자동차·배터리 기업의 미국 투자 확대를 견인했던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30D)가 올해 9월 말 조기 종료될 예정이다. 또한, 기존에 미국 내 생산 요건만 규정하던 배터리 생산 세액공제(§45X)에도 신규 공급망 요건이 추가됐다.
미국 싱크탱크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전기차 세액공제가 전면 폐지될 경우 미국 내 전기차 제조사(현대차 포함)의 판매량은 최대 37%(약 31만 대)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근거로 한경협은 전기차 세액공제 종료 시 한국 기업의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이 연간 최대 4만 5천 대, 매출 약 19억 5,508만 달러가 줄어들 수 있다고 추정했다.
현대차그룹은 북미 전기차 시장 확대를 위해 미국 조지아주에 약 80억 달러를 투입, 전기차 전용 공장(HMGMA)을 건설해 왔다. 올해 1월부터는 IONIQ5, IONIQ9, EV6, EV9, GV70 등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5개 차종이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되며 투자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OBBBA 발효로 투자 회수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전기차 세액공제는 단순한 구매 지원책이 아니라 △핵심광물 원산지 요건(미국 또는 FTA 체결국 조달 비율 60% 이상) △배터리 부품 구성 비율 요건(북미산 비율 60% 이상) △공급망 요건(해외우려기관 세액공제 제외) 등을 통해 공급망 재편을 유도하는 전략적 도구로 활용돼 왔다.
한국 배터리 3사는 미국 내 생산거점의 72% 이상을 완성차 업체와의 합작 형태로 구축해 왔으나, 전기차 세액공제 종료로 수요가 줄면 가동률 저하와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
그간 배터리 생산세액공제(§45X)는 지금까지 미국 내 생산 요건만 요구했으나, OBBBA는 전기차 세액공제(§30D)에 적용되던 ‘우려 외국기업(FEOC)’ 개념을 확장한 ‘금지 외국기업(PFE)’ 개념을 새로 도입했다.
‘우려 외국기업’이란 중국·러시아·이란·북한 등 특정 국가 정부 또는 그 산하기관이 25% 이상 지분을 보유하거나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기업을 뜻한다. 배터리 부품이나 핵심 광물에 1%라도 이들 기업이 개입하면 세액공제가 전면 배제되는 등 기준이 매우 엄격했다.
‘금지 외국기업’은 정부뿐 아니라 민간 기업 간 관계까지 포함한다. △해외 우려국 정부가 50% 초과 지분을 보유한 외국통제기업(FCE) △제재 대상으로 지정된 특정 외국기업(SFE) △SFE가 25% 이상 지분을 보유하거나 인사권·계약관계 등을 통해 경영에 관여하는 외국영향기업(FIE)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만, ‘금지 외국기업’이 제품 생산 과정(부품·설비·서비스 제공 등)에 일정 비율 이하로만 개입할 경우 세액공제가 허용돼 한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경협은 이번 OBBBA 발효로 전기차 보조금 축소에 따른 수요 위축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하며, 국내 전기차·배터리 기업이 글로벌 수요 둔화 속에서도 생산 기반을 유지하고 투자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정책 기금과 세제 혜택 등 재정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선, 국가첨단전략산업기금의 신속한 조성과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지난 3월, 50조 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을 산업은행에 설치하는 방안을 발표했지만, 관련 법 개정과 기금채권 국가보증 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아 하반기 본격 집행이 지연될 우려가 있다. 이에 한경협은 법 개정과 보증 동의안을 서둘러 처리하고 산업은행 내 전담부서를 설치해 집행 시차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재 국가전략기술 R&D, 사업화 시설투자, 연구·인력개발비 등에 각각 15%, 30%의 세액공제가 적용되고 있으나 현행 법인세 감면 방식은 영업손실 시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한경협은 직접 환급이나 환급금 제3자 양도 제도 등 세액공제 유동화 방안을 도입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국내 배터리 3사는 생산을 주로 해외에서 수행하고 국내에서는 R&D에 집중하고 있어, 연구·인력개발비에 대한 한시적 직접 환급이나 환급금 제3자 양도제 등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내 생산을 촉진하는 세제 도입도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배터리 생산 세액공제 및 직접 환급 제도를 통해 자국 내 생산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생산 세액공제 도입 논의가 진행 중이나, 관련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이에 한경협은 최소한 경쟁국 수준의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며, 생산 세액공제는 투자 세액공제와 중복 적용을 허용하고 직접 환급 및 제3자 양도 제도를 통해 국내 투자와 생산을 동시에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경협은 중장기 공급망 리스크 대응을 위해 5년으로 제한된 공급망안정화기금의 조성 기간을 연장하고, 수출입은행 출연금을 재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공급망안정화기금은 2029년 종료될 예정이며, 기금채권 발행 방식에 의존하고 있어 출자·고위험 투자·금리 보전 등 유연한 지원 수단을 활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불확실한 글로벌 정책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생산 기반을 유지하고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선제적 재정 지원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라며 “전기차·배터리 산업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기금과 세제 혜택을 결합한 종합적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