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혁신의 판도 바꾸는 ‘첨단패키징’ 시대 도래”
2030년 480억 불 규모, 글로벌 기술개발·투자·인프라 등 다중 노력
12인치 공공 팹 구축, 나노종합기술원 산업 생태계 전환 주역 앞장
반도체 산업은 오랫동안 무어의 법칙을 따라 발전해 왔다. 웨이퍼 위에 더 작고 정밀한 회로를 새기는 미세 공정 기술이 주도권을 쥐면서 전(前)공정 중심의 기술 혁신이 반도체의 성능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수 나노미터(nm) 이하의 극미세 공정에 진입하면서, 개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공정의 물리적 한계도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모어 댄 무어(More than Moore)’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 전략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 핵심으로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이 주목받고 있다.
첨단 패키징은 칩 제조 후 단계인 후공정에서 단순히 칩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전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넘어서 혁신적인 기법으로 여러 개의 반도체 칩을 하나로 묶어 성능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2.5D/3D 적층 기술(인터포저 활용), 팬아웃 웨이퍼 레벨 패키징(FOWLP), 시스템인패키지(SiP) 등이 대표적인 기술로 개별 칩 크기를 줄이지 않고도 전체 시스템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어 전문가들은 첨단 패키징을 통한 이종 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이 최첨단 미세 공정에 버금가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첨단 패키징 기술은 AI, 고성능 컴퓨팅(HPC), 5G, 자율주행과 같은 대규모 데이터 처리가 필수적인 응용 분야의 등장과 함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칩렛(chiplet)’ 기반 구조는 대규모 기능을 여러 개의 소형 칩으로 나눠서 제조한 후, 이들을 첨단 패키징으로 통합해 고성능 칩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비용과 성능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 상무부가 ‘아무리 전공정이 우수하더라도 패키징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밝힌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첨단 패키징은 이제 단순한 후공정 기술이 아니라, 반도체 혁신을 견인하는 핵심 기술이자 산업의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첨단패키징, 반도체 패권의 핵심
첨단 패키징 시장은 AI 및 HPC 수요의 폭발과 함께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리서치앤마켓에 따르면, 글로벌 첨단 패키징 시장은 2025년 약 348억 달러에서 2030년에는 약 48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특히 AI 반도체 시장은 같은 기간 80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며, 첨단 패키징 수요를 직접적으로 견인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장의 흐름은 첨단 패키징 기술이 단순 후공정, 과거 모놀리식(monolithic) 방식 에서 벗어나 다수의 전문화된 칩렛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 고밀도로 집적하는 이종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칩 설계 기업(팹리스), 제조사(파운드리), 그리고 패키징 전문 기업(OSAT) 간의 긴밀한 생태계 협력이 점점 더 중요해 지고 있다.
대만 TSMC는 CoWoS, InFO, SoIC 등 첨단 패키징 솔루션을 강화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AI 칩 수요가 폭증하면서 CoWoS 공정 능력을 2024년 한 해에만 월 7만 5천 장 수준으로 두 배 이상 늘렸지만 여전히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2026년까지는 2023년 대비 네 배 수준으로 증설할 계획이다.
미국 인텔은 Foveros와 EMIB 등과 같은 3D 칩렛 패키징 기술에 집중하며, 말레이시아에 약 9조 원 규모의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설 중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패키징을 결합한 턴키 서비스를 내세우며, 천안에 약 18억 달러 규모의 첨단 패키징 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OSAT 업체들도 대형 업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확보를 위한 선제적 투자를 공격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시장, 후공정 중심 재편
첨단 패키징 시장은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 생산 거점이 압도적으로 편중되어 왔으나 최근 미국과 유럽은 첨단 패키징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은 2022년 통과된 CHIPS법을 토대로 첨단 후공정 기술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올해 1월, 애리조나주립대(ASU)를 세계 최초의 300mm 첨단 제조 및 패키징 연구 시설로 지정했으며, 민간 부문에서도 TSMC와 미국 OSAT 2위 업체인 Amkor가 협력해 20억 달러 규모의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2년 발표한 EU 칩스법을 기반으로 패키징 R&D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말 드레스덴에 '첨단 패키징·이종 집적 파일럿 라인(APECS)'을 출범시켰으며, 총 7억 3천만 유로가 투입될 예정이다. 중국 또한 상하이와 장쑤성 등의 지역에 300mm(12인치) 패키징 팹 건설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며, 자국 중심의 첨단 패키징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첨단 패키징 기술은 소재, 장비, 설계, 공정 등 다양한 전문 분야가 융합된 기술로, 어느 한 국가나 기업이 단독으로 모든 생태계를 갖추기 어렵다. 따라서 각국은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며 표준화된 인터페이스, 공동 인력 양성, 기술 교류 등을 통해 협력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韓 생태계 구축 必, 지금이 골든 타임
글로벌 주요국과 기업들이 첨단 패키징 역량 강화를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이 흐름에서 한발 뒤처진 모습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일부 기술 개발은 진전되고 있지만, 300mm급 첨단 패키징 전용 인프라는 아직 본격적으로 구축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이 바로 고성능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팹리스 중심의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하는 시점이라는 데 있다. 후공정 역량의 미비는 산업 전반의 병목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의 성장 잠재력을 제약하는 핵심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첨단 패키징 인프라는 구조적으로 여러 한계를 안고 있다. 우선, 첨단 패키징 전담 기업이 사실상 삼성전자에 편중돼 있어, 대만이나 미국처럼 다양한 파운드리·OSAT 기업이 공존하는 생태계와는 거리가 멀다. 기술력과 생산 규모에서 후공정 전문 기업들이 글로벌 수준과의 격차를 좁히기 어려운 구조다. 여기에 고밀도 기판, 플립칩 본딩, 팬아웃 공정 등 핵심 장비와 소재의 해외 의존도 역시 높아, 공급망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
또한 300mm 기반의 테스트 인프라가 전무해, 첨단 패키징 시제품과 신뢰성 검증조차 대부분 해외 OSAT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국내 공공 팹은 대부분 200mm 수준으로, AI용 고대역폭 패키지나 칩렛 기반 구조에 대한 실증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기술 격차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첨단 패키징 기술 수준은 글로벌 선도국 대비 약 66%에 불과하며, 기술 격차는 평균 3.4년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투자 규모 역시 문제다. 미국, 유럽, 중국이 수억 달러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공공·민간 투자를 통해 후공정 역량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투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결국,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의 경쟁력 확보는 단순히 기술 개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반의 구조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다.
■나노종합기술원, 미래 반도체 전략 연결고리
첨단 패키징은 이제 반도체 성능 향상의 보조 수단이 아닌, 기술 패권 경쟁의 판도를 가르는 핵심 열쇠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내 첨단 패키징 생태계 조성을 위한 핵심 공공 인프라로 나노종합기술원(NNFC)이 그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 인프라 기관인 나노종합기술원은 그간 국내 산·학·연의 나노 및 반도체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뒷받침해 왔다. 특히 2021년에는 삼성전자, ASML, 국내 소부장 기업들과 협력해 국내 최초의 300mm 소재·부품·장비 테스트베드를 구축·운영하며 공공 플랫폼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나노종합기술원은 2024년부터 2029년까지 총 455억 원 규모의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12대의 300mm 첨단 패키징 장비구축을 추진 중에 있다.
이번 사업의 핵심은 국내 최초로 300mm 웨이퍼 기반의 개방형 첨단 패키징 R&D 플랫폼을 구현하는 데 있다. 전용장비 및 플랫폼 투자를 통해 △재배선(RDL) 공정 기반 시험지원 라인 구축 △2.5D 인터포저 패키징 환경 조성 △현장 중심의 교육·실습장 운영 등이 단계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현재는 실리콘 브릿지 및 인터포져 등 초기단계 첨단패키징 기술지원이 가능한 수준이나 연구자 의견을 반영하여 웨이퍼 레벨 공정(Full Process)까지 지원 가능한 추가장비를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러한 인프라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국내 팹리스 기업과 스타트업, 대학 연구진도 보다 쉽게 시제품 제작과 공정 테스트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해외 OSAT 의존도가 높았던 첨단 패키징 실증 환경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소·중견기업의 기술 자립과 혁신을 촉진하는 플랫폼 허브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나노종합기술원은 현재 국내에 전무한 300mm 공공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국내 첨단 패키징 생태계의 허브로서 공정 라이브러리 및 설계 IP 확보, 개방형 교육·실습장 운영 등 인프라의 소프트 파워 구축에도 중점을 두어, 표준화된 공정 지식 확산과 숙련된 인력 양성에도 힘쓸 예정이다.
더 이상 후공정은 뒷단의 기술이 아니다. ‘패키징 없이는 반도체 완제품도 없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이 메모리 강국에서 ‘종합 반도체 리더’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팹리스 생태계 육성과 더불어 후공정 패키징 역량 강화가 필수다. 설계-제조-패키징에 이르는 반도체 전 가치사슬(Value Chain)의 균형 있는 경쟁력 확보가 곧 국가 기술 주권을 가늠하게 될 것이다.
이제 정부, 산업계, 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공공 인프라 구축, 핵심 소부장 기술 자립, 전문 인력 양성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노력을 본격화할 때다. 나노종합기술원을 중심으로 국내 첨단 패키징 생태계의 중심축이 마련된다면, ‘K-첨단 패키징’ 시대의 서막도 결코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