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섬유 산업의 밸류체인(자료: 산업연구원)AI 데이터센터와 해저케이블 투자 확대로 광섬유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국내 광섬유 산업은 범용 제품 중심의 생산구조와 취약한 프리폼 제조기반으로 고부가 시장 대응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광통신 인프라 강국의 경쟁력을 소재산업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프리폼과 차세대 광섬유를 중심으로 공급망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산업연구원(KIET, 원장 권남훈)이 17일 발표한 ‘AI 시대 주목받는 광섬유, 한국의 현주소와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유선 인터넷 회선의 90.5%가 광케이블 기반으로 OECD 2위 수준의 광통신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광섬유 소재의 생산 역량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분석됐다.
광섬유는 전송 거리가 길어질수록 신호 감쇠와 발열, 전력 소모가 커지는 구리 배선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어 데이터센터 내부 연결뿐 아니라 데이터센터 간 연결(DCI)의 핵심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AI용 서버는 기존 클라우드 서버보다 약 16배 많은 광섬유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4대 빅테크의 2026년 설비투자 계획은 약 7,250억달러로 전년대비 77% 증가했으며, 해저 광케이블 신규 투자도 2025~2027년 약 130억달러로 직전 3년의 약 2배에 이를 전망이다.
이에 따라 AI용 광케이블 수요는 2024년 137% 급증한 데 이어 2025년에도 77% 증가했으며 2029년까지 연평균 26%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CRU 기준). 데이터센터용(AI+클라우드) 광섬유 수요 비중도 2024년 5% 미만에서 2027년 약 30%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광섬유 수요 확대는 가격 상승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CRU 글로벌 광섬유 가격지수는 2024년 3월 78.6에서 2026년 3월 263으로 급등했다.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본격적으로 누적되는 가운데 기존 초과공급이 해소되고, 최대 생산국인 중국에서도 범용 광섬유 공급이 축소된 영향 등이 가격 상승을 견인한 것으로 분석됐다.
광섬유 산업은 원료에서 프리폼, 광섬유, 광케이블, 시공·설치로 이어지는 밸류체인을 형성한다. 이 가운데 프리폼은 광섬유의 굴절률을 나노미터 수준으로 제어해야 하는 고난도 소재로, 높은 기술 장벽 때문에 부가가치가 집중되는 단계다.
프리폼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은 전 세계 약 20개사에 불과하다.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프리폼부터 광섬유, 광케이블까지 수직계열화하고 프리미엄 규격까지 생산하면서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광섬유는 용도와 성능에 따라 제품군도 세분화되고 있다. G.652.D는 FTTH·5G 등 일반 통신망에 사용되는 범용 표준 광섬유이며, G.657.A1·A2는 좁은 공간에서 구부려도 손실이 적은 내굴곡 광섬유로 데이터센터 내부의 고밀도 배선 등에 활용된다.
반면 G.654.D·E는 초저손실·대유효면적 특성을 갖춘 프리미엄 제품이다. G.654.D는 해저케이블, G.654.E는 데이터센터 간 연결(DCI)과 백본망 등에 사용된다. 여기에 여러 코어를 통해 전송용량을 높이는 멀티코어 광섬유(MCF)와 공기 코어를 활용해 초저지연 특성을 구현하는 할로코어 광섬유(HCF)가 차세대 제품으로 부상하고 있다.
주요국 기업들은 이 같은 고부가 제품군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대하고 있다. 글로벌 매출 1위인 미국 코닝(Corning)은 범용 제품부터 해저용·지상용 G.654.D·E까지 생산하며 2026년 멀티코어 광섬유을 출시했고 HCF(할로코어) 생산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스미토모는 G.654.D·E와 MCF를 양산하고 편광유지 광섬유(PMF) 등 특수 광섬유에도 강점을 갖고 있다. 후루카와는 HCF의 케이블화·접속 기술까지 개발했다.
세계 최대 광섬유 생산국인 중국 기업들도 범용 G.652.D 중심의 생산구조에서 벗어나 G.654.E·MCF·HCF 등 프리미엄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광섬유를 생산하는 기업이 사실상 LS전선과 대한광통신 2개사이며, 프리폼을 자체 생산하는 곳은 대한광통신 1개사에 그친다.
대한광통신 역시 범용 G.652.D와 내굴곡 G.657.A1·A2에 생산이 집중돼 있으며, DCI·백본용 G.654.E와 해저용 G.654.D 등 최상위 프리미엄 제품은 양산하지 못하고 있다. MCF·HCF 등 차세대 광섬유 기술 역시 초기 단계에 머물러 AI 수요 확대가 고부가가치화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 세계 광섬유 주요 수출국의 수출 금액 및 단가 추이(자료: ITC 데이터를 바탕 산업연구원 작성)국내 산업의 경쟁력 약화는 수출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의 광섬유 수출액은 2022년 5,800만달러에서 2025년 2,700만달러로 감소해 연평균 22.3% 줄었으며, 세계 순위도 15위에 머물렀다. 수출단가 역시 같은 기간 kg당 81달러에서 63달러로 하락했다. 이는 국내 수출이 범용 광섬유에 집중되어 중국(kg당 26달러), 인도(17달러)의 저가 물량 공세에 밀린 결과로, 프리미엄 제품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111달러)과 대비된다.
보고서는 주요국의 광섬유 경쟁력 강화에는 정부 차원의 공급 기반 조성과 초기 수요 창출 정책이 함께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국가계획을 통해 내수를 창출하고 설비투자 보조금과 국영 통신 3사의 집중 조달로 자국 기업 중심의 시장을 형성했다. 2026년 1월부터는 정부조달에서 국산품에 20%의 평가가격 우대를 적용하고 있다.
일본은 1970~1980년대 NTT와 광섬유 기업들의 공동 연구를 통해 VAD 공법을 개발하고 자국 간선망에 적용하면서 기술개발과 초기 수요를 연계했다. 미국은 424억5천만달러 규모의 광대역 보급 사업(BEAD)에 미국산 우선 구매법(BABA)을 적용해 미국산 광섬유 사용을 의무화했다. 이를 통해 공공조달 수요를 기반으로 코닝 등 자국 기업의 생산능력 확대를 뒷받침했다.
반면 한국은 소부장 핵심전략기술 200대에 광섬유 소재가 독립 분야로 포함되지 않아 관련 연구개발과 산업 육성이 제한적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광통신 인프라를 갖추고도 국내 소재의 초기시장 형성을 지원하는 조달정책이 부족해 수요 기반이 소재 공급망 경쟁력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국내 산업이 현재 구조에 머물 경우 AI와 데이터센터 확대로 급성장하는 프리미엄 광섬유 시장을 해외 기업에 내주고 범용 제품 중심의 저가 경쟁에 고착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해저케이블 등 국가 기간망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를 해외에 의존할 경우 공급망 안보 측면에서도 취약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첫째, 프리미엄 광섬유 프리폼을 소부장 핵심전략기술에 포함해 연구개발·세제·정책금융 지원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동시에 프리폼 원료인 고순도 사염화규소 등 상류 원자재의 공급망 안정화도 추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둘째, MCF·HCF 등 차세대 광섬유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정부 주도의 대형 연구개발 사업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현재 상용화 초기 단계인 차세대 제품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해 향후 시장 선점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전력망·통신망 등 국가 기간사업과 연계해 국산 광섬유 소재의 안정적인 초기 수요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급 측면의 기술개발 지원과 함께 공공 부문의 수요 창출을 병행해야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산업연구원 AI디지털전환연구실 탁은명 연구원은 “결국 한국이 세계적인 광통신 인프라를 갖춘 ‘광망 강국’에서 광섬유 소재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범용 광섬유 생산 확대보다 부가가치가 집중된 프리폼과 차세대 광섬유 기술 확보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